어린 시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에 늘 의문을 가졌다. 예수 그리스도와 거리감을 가진 ‘문화적’ 기독교인으로 생활했다. 내가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것도 아닌데 태어나게 해놓고 길어야 70·80년 동안 세상에서 한 일을 가지고 천국과 지옥으로 가게 한다는 것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교회에서 늘 주변인으로 머물렀다. 충돌이 일어나는 게 싫어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예수님 얘기를 아예 꺼내지도 않았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즐길 것 다 즐겼다. 주일예배는 성의 없이 출석했다. 예배는 일주일의 피로를 씻는 평안한 단잠의 시간이 될 때도 많았다. 그래도 지옥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은 늘 있었다.
그런 가운데도 성령의 인도하심과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맛보기도 했다. 몇 번에 불과했고, 그런 감격의 순간은 너무도 빨리 날아가 버렸다. 말씀의 씨가 땅에 닿기도 전에 공중에서 휙 날아가는 그런 신앙이었다. 그런데 많은 교회 성도들은 저마다 만난 예수님을 기쁘게 간증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뭘 하고 있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곡식 잔뜩 쌓인 곳간에서 쥐가 굶어 죽는 꼴이었다.
어느 날 한 성도가 간증을 했다. 부러움 없이 잘살다가, 예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아내의 변화에 충격을 받았고, 아내와 함께 교회에 왔다 자신도 성령의 충만하심을 체험했다는 내용이었다. 그 간증에 감동을 받아 다른 분들의 간증도 열심히 듣기 시작했다.
‘저들이 변화됐다면 내가 안 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나도 저들처럼 기쁨과 확신에 찬 나만의 간증을 하나님과 일대일 면전에서 하리라 다짐했다.
그러다 간절히 엎드렸던 많은 간증자들과 같은 절박함이 내게 없다는 걸 알게 됐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한 죄. 나는 정말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했구나. 그분을 나의 주인으로 영접하지 않고 살았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역사적 증거 앞에서조차 나는 간절히 하나님께 매달리지 않고 내 전부를 의뢰하지 않았던 것이다.
만약 내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누구에 의해 죽을지 알고 태어났다면, 그걸 다 알고 살아가고 있다면, 하루하루가 얼마나 끔찍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온 힘을 다해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우리를 위해 죽으러 오시고 또 보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보였다. 인간의 기준으로 보면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아도 될 이유가 충분했던 사람들이 부활의 예수님 앞에서 인생을 맡기고 참자유를 누리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예수님을 전하는 부활의 증인들이 된 것을 볼 수 있었다.
복음은 책을 읽고 깨닫는 일처럼 어려운 게 아니라 역사적 인물인 예수님이 이 땅에 육신으로 오셨다가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명하신 걸 아는 것이다. 어떤 자매 간증에서처럼 저능아도 그 사실을 믿고 예수님과 동행하게 되는 게 바로 복음이다.
고린도전서 말씀처럼 예수를 주인으로 고백하게 하는 것은 오직 성령께서 해주셔야 하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됐다. 나도 비로소 아내와 같은 길을 갈 수 있게 됐고, 우리 교회의 여러 지체들과도 같은 길을 갈 수 있게 됐다. 더 이상 교회의 주변인이 아닌 예수님에 대한 큰 확신을 넘어 항상 그분과 동행하며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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