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한 부담과 긴장감은 생활에 활력을 불어넣는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부담감이 한 번 덮치면 급속도로 우울해졌고 때로는 삶을 놓고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공부를 잘했고 상도 많이 받았던 나는 늘 아버지의 자랑이었고 아버지는 당신의 못다 이룬 꿈을 모두 내게 걸었다. 큰 부담이었다. 게다가 다섯이나 되는 동생들과 어려운 경제 사정도 늘 내 어깨를 눌렀다.
아버지는 한숨을 자주 쉬었다. 항상 장녀인 나와 고민을 나누고 싶어했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 고민을 듣는 게 견딜 수 없는 큰 짐이었다. 들으면 들을수록 부담이 점점 커져 마음은 늘 막다른 골목이었다. ‘내가 죽어버리면 이 모든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도 많이 했다. 그때 인생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산다는 건 무엇일까’ ‘인생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죽음 이후의 세상은 정말 있을까’에서 시작해 ‘하나님이 정말 계실까’ 하는 근본적 물음에 대한 생각은 끝이 없었다. 결국 이런 힘든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아 교회마당에 첫발을 들여 놓았다. 대학시절 내내 십자가 사랑에 감격하며 살았다. ‘어떻게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죽어 주셨나!’
예수님 소리만 들어도 눈물이 났고, 내 인생 끝 날까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어떤 사명이라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졸업 후 발령을 받아 교단에 서면서부터 남들이 보기엔 훌륭한 신앙인이었지만 내 자신은 신앙의 한계를 느꼈다. ‘이래라저래라’ 하는 성경 말씀들이 부담이 되기 시작하더니 결국 그 부담은 넘을 수 없는 산이 됐다.
자꾸 대학시절이 그리워졌다. ‘기도가 적어서 그런가’ ‘성령 충만을 받지 못해서 그런가.’ 무척 애를 썼지만 수시로 넘어지는 내 자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던 어느 날 목사님이 “부활이 빠진 십자가에 머무른 신앙은 한계가 있다”는 설교를 했다. 그리고 사도행전을 풀어주시면서 사도들이 날마다 전했던 것은 예수님의 부활사건이었다고 했다. 그 말이 딱 내게 하시는 말 같았다.
‘사람인 예수! 그분을 어떻게 하나님으로 믿을 수 있는가.’ 다시 성경을 보며 엎드릴 때,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이 성경과 예수님을 믿었음이 보였다. 부활하신 주님이 내게 물어 보시는 것 같았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니.’ 예수님은 내 죄를 위해 죽어 주신 분 정도였지 내가 부딪치는 많은 문제와는 상관이 없는 분이셨다. 그러니까 결국 내 인생은 내가 살았던 것이다. 염려하고 걱정하고 부담에 눌리는 내 인생의 주인은 바로 나였다. 그제야 내 신앙의 한계가 왜 왔는지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구속의 사실만 믿고 있었지 부활하셔서 나의 주인이 되셨음은 믿지 않았던 것이다.
‘원래 예수님은 나의 주인이셨구나!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믿는 거구나!’ 그제야 믿음이 무엇인지 정확해졌다. 예수님을 나의 주로 믿을 수 있도록 증거로 주신 것이 바로 부활의 표적이라는 것이 정확해졌다.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믿으니 염려도, 무거운 부담도 다 떨쳐버리게 됐다. 경제적 어려움이 닥치든, 생활에 어려움이 생기든, 나의 주인이 예수님이심을 고백하니 마음이 자유로워졌다. 한계에 갇혀 있던 내가 드디어 한계를 뛰어넘는 삶을 살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으로 오셔서 죽고 부활하시어 나의 주인이 되어 주신 주님과 매일매일 동행하니 인생의 어떤 문제도 두렵지 않다. 예수님은 영원한 나의 주인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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