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는 이 세상에서 가장 기쁜 소식 ‘복음’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인간의 죄를 위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기 때문이다(히 9:12).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십자가’만 아니라 ‘율법’ 또한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갈라디아교회의 유대주의자들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 할 것이 없다(갈 6:14)”라고 단호하게 선포한 것이다.
십자가에는 인간의 죄를 위한 영원한 속죄가 있다(히 9:12). 그리고 십자가에는 인간의 죄가 얼마나 악하고 무서운지에 대한 충격이 있다(행 2:36,37). 또한 십자가에는 죄인을 향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롬 5:8). 이것뿐만 아니라 십자가에는 우리 옛사람의 죽음이 있다(롬 6:6). 또한 십자가에는 보혈의 능력이 있다(히 9:14). 이렇게 영적인 보화들이 가득한 십자가는 복음이며 하나님의 능력이다(롬 1:16). 그런데 십자가 안에 있는 이와 같은 사실들을 우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고 확증할 수 있는가. 그 답은 ‘부활’이다.
성령께서는 부활을 통해서 십자가 속에 있는 영적인 진리들을 믿을 수 있고 확증할 수 있게 하신다. 왜냐하면 부활은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이 성자 하나님이심을 선포하기 때문이다(롬 1:4). 제자들이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알게 된 것은 부활로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게 되었을 때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부활의 주를 만난 후 ‘십자가’만 자랑한 것이다.
‘피’ 그리고 ‘십자가’ 사건 자체보다 더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누구의 피인가?’와 ‘십자가에서 누가 죽었는가?’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확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요 20:31, 롬 1:4).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이 누구신지 모르면 그 사람에게 있어 십자가 사건은 그냥 한 사람의 죽음일 뿐이며 그 피 또한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예수가 진정 누구신지 알지 못했을 때, 그에게 있어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천인공노할 신성모독자의 죽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사도 바울은 비로소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할 속죄의 죽음이었다. 부활의 빛을 통해 바라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가장 적대적이었던 ‘대적자 사울’을 가장 헌신적인 ‘사도 바울’로 바꿔놓기에 충분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사랑’에 강권되었기 때문이다(고후 5:14). 이처럼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가 부활하심으로 ‘나의 주, 나의 하나님(요 20:28)’이신 것을 확증하였을 때,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구원의 복음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기쁜 소식이 되는 것이다.
늘 강조하는 말이지만 초대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선포하였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사실만 선포하였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우리의 주와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했다는 것이다(행 2:36).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면 부활만 강조하고 십자가를 약화시키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부활을 강조하는 이유는 십자가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믿는 자들로 하여금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알게 하기 위해서이다. 십자가 복음의 광채는 부활로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 때 빛나게 된다. 이 복음의 능력이 한국 교회 가운데 다시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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